종말의 세라프

종세 전력 - 미카엘라 이야기

타스카 2016. 3. 12. 00:17
뚜벅뚜벅, 걸어가는 발걸음소리가 조용한 골목 내에 울려퍼졌다. 미카엘라가 항상 올 때마다 이곳은 적막했다. 과거 자신이 지냈던 곳이었지만 그때는 햐쿠야 고아원의 가족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조용한 곳인지 몰랐었다. 그때는 항상 떠들썩했다. 그때의 자신은 가축이였었지만 그래도 가족들이 함께였다. 힘들어도 다 같이 있는 것 하나만으로도 버틸 수 있었다. 이곳은 이런 적막하고 고요한 곳이 아니었는데.

자신이 흡혈귀가 되고 난 이후에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너무도 다른 분위기에 미카엘라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울었더랬다. 그때는, 아직 자신은 어렸다. 자신의 자만으로 인해 가족들을 모두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없어진 이곳은 너무도 적막하여 가끔 미카엘라는 제 발걸음 소리라도 채우려 이곳을 찾아오곤 했다. 그게 자신의 작은 속죄일까. 그저 걸었다. 오늘도 여김없이 천천히 그곳을 걷고 있었다.

"...으아앙..."
"뚝, 울지마. 안 된다고 했잖아."
"하지만..."

그 골목을 지나, 광장으로 나가려는 찰나였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상귀넴에 있는 인간들은 전부 아이들이기 때문에 자주 있는 일이지만 미카엘라는 항상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그 자신도 인간이였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골목을 빠져나간 후에 그 울음소리로 시선을 돌렸다. 갓 5살쯤 되어보이는 남자아이 하나와, 그 누나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그곳에 있었다. 남자아이는 울고 있었다. 손가락을 한쪽으로 가리키면서. 그리고 그런 동생을 누나가 달래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조금 궁금해져서 미카엘라가 아이의 손가락 끝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흡혈귀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발 아래에 짓밟혀 있는, 분홍색 토끼 인형이 있었다.

"누나... 내 인형..."
"안 돼. 이제 버려야 해. 울지마. 응?"
"으아아앙."

하지만 누나의 말에 아이는 더 서럽게 울었다. 아마도 자신의 소중한 물건이겠지. 미카엘라는 살짝 한숨을 쉬고는 그 흡혈귀 무리로 다가갔다. 

"저기."
"...뭐지?"
"발 밑에 그거, 좀 주워도 될까?"

미카엘라가 인형을 밟고 있는 흡혈귀의 발 아래를 가리켰다. 그러자 흡혈귀가 살짝 시선만 내려서 그것을 보고는 코웃음을 쳤다.

"내 발 밑에 무언가 문제가 있나?"
"......."

미카엘라가 삐딱하게 다시 그 흡혈귀를 바라보았다. 이래서야, 오만한 흡혈귀들은. 이들은 항상 이랬다. 제 발 밑은 전혀 보지 않는다. 상위종이라는 이유로 인간들을 얕보고 깔보며, 짓밟고 다니는... 

"어이, 저 녀석... 그 녀석이다."
"뭐?"
"그, 여왕이 총애하는... 그 녀석이라고."

다른 흡혈귀가 넌지시 미카엘라와 마주하고 있는 흡혈귀에게 언질을 주었다. 그러자 그는 살짝 놀라워하며 미카엘라를 바라보았다. 아, 하고 살짝 감탄사를 내뱉고는 슬며시 발을 들었다. 미카엘라는 바로 몸을 숙여 밟혀서 더러워진 토끼 인형을 주웠다. 밟힌 흔적이 선명했지만 손으로 우선 묻은 흙먼지를 탈탈 털어냈다. 그리고 그 흡혈귀 무리들은 빠르게 그 자리를 떠났다. 왠지 엮이기 싫어하는 눈치였다. 뭐, 미카엘라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자, 여기 있어."

몸을 수그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춘 후에 털어낸 인형을 아이에게 건넸다. 누나는 그런 미카엘라를 경계했지만, 동생은 자신의 인형이 제 품에 다시 돌아오는 것이 중요했나보다. 아이가 손을 뻗어 인형을 받아들었다.

"...가자."

그리고 아이가 인형을 받자마자 누나는 아이의 손을 끌고 뒤돌아서 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당연한 일인가. 미카엘라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저 앞에서 의미모를 미소를 짓고 있는 페리드 바토리와 눈이 마주쳤다. 페리드는 아주 즐거워보이는 표정으로 미카엘라에게 다가왔다.

"하핫, 역시 상냥한 미카쨩. 오늘도 착한 일을 하네요? 미카쨩을 보고 있으면 역시 즐거워."
"신경쓰지 말고 갈 길을 가시지."
"에이, 무슨 섭섭한 말씀을. 우리 귀여운 미카쨩이 가축들을 위해주는 걸 보면, 이 페리드 바토리. 너무 감격스러워서 어쩔줄 모르겠는걸? 예전 기억 나지 않나요? 아까 그 토끼 인형같은 걸 꼭 껴안고 울면서 잠이 들곤 했잖아요?"
"시끄러워."

항상 이렇게 자신의 속을 긁는다. 즐거운 듯 웃으면서. 미카엘라는 그게 항상 마음에 안 들었다. 그렇다. 제 가족들을 죽인 건 눈 앞의 흡혈귀였다. 그것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지만, 자신은 그때 어렸다. 그렇게 기댈 곳 하나 없는 곳에서 제가 의지할 수 있던게 무엇이 있었을까? 인간이였을 시절에, 그 적막한 골목의 작은 공간에서 제 가족들과 함께 공유하던, 인형 하나가. 때가 타서 더럽고 너덜너덜했던 그 곰 인형 하나가 그때 잠시나마 자신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 사실을 지금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눈 앞의 흡혈귀는.

"하하핫, 그렇게 화가 나나요? 어릴 적 이야기를 하는 게?"
"......."

미카엘라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무시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이제껏 그와 마주하며 터득한 제일 빠른 방법이었다. 그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페리드는 여전히 즐거운 듯한 표정으로 스쳐지나가는 미카엘라를 바라보았다. 

다시 골목을 걸었다. 자신이 지내던 그곳을 지나쳤다. 항상 지나치기만 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자신의 발걸음이 멈추어졌다. 뒤를 돌아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한걸음 한걸음 그곳으로 다가갔다. 문고리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닿지 못했다. 허공에 멈춘 채, 한참 망설였다. 그리고 결국 미카엘라는 자신의 손을 거두었다. 아직은, 이 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몸을 돌려 다시 적막한 복도를 걷는다. 그저 제 발소리만 그곳에 가득했다.